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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동물사전 (퍼시벌그레이브스×소피아 키네울프)

By. 솦

01.
"여기, 부탁하신 꽃이요."

연노란 색 포장지에 감싸인 꽃다발은,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잡기에 딱 알맞은 두께였다. 그 정도면 과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는 것처럼 사내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고, 형식적인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고, 그런 뒤에는 느긋한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잘라낸 줄기와 잎들, 포장용 끈 조각 따위로 어지러워진 매대를 정리하던 직원은 사내가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시야의 가장자리로 보았다. 보통 누군가 장미 꽃다발을 사갈 때는 얼굴이 붉어져 있다든지 들뜬 목소리로 묻지도 않은 기념일 소식을 전한다든지 해서 연인에게 선물하실 거라고 짐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방금 그 손님은 그 꽃다발을 들고 거래 테이블에 앉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던 탓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그 이질감이 입 안을 간지럽혔다.


02.

얼씨구, 저러다 여기서 키스까지 하겠네. J는 물기를 다 닦은 컵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으며 혀를 쯧, 찼다. 아까부터 분위기가 너무들 좋으신 나머지 후식을 준비해 드릴까 물으러 가지도 못하고 있는 이 웨이터도 좀 생각해주시면 좋으련만, 서로의 눈에 서로만 담기는 나머지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고 어느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나 있었다.

진심으로 억울하다거나 서럽단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퍽 즐거워 보였으므로, 어쩐지 불필요하게 시선이 가고,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어떤 황홀한 기분을 저도 맛보고 싶은 호기심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이 따스한 휴일 오후를 함께 보낼 연인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도 아닌데. 원래 남의 정원에 난 풀이 더 푸르러 보인다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한숨같은 웃음이 뒤를 잇는다.

컵 정리를 마치고, 수건을 가지런히 접어 제자리에 둔 뒤에 다시 흘끔, 그 쪽을 살피면, 다행히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멀어져 있었다. 이제는 둘 다 의자의 등받이에 등이 닿을 만큼.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J는 냉큼 트레이와 손수건을 집어들고 후식을 주문 받으러 힘찬 걸음을 옮겼다.


03.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닐 걸."

황금같은, 정말 황금같은 공휴일이었다. 반 년 전 안보부로 발령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근무환경이 이럴 줄은 몰랐던 파릇한 사회 초년생이, 집을 거의 여관방 취급하며 나흘 연속으로 초과 근무를 해서 간신히 어제 일을 마쳐놨는데.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같은 동네 사는 직장 동료와 가까운 공원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왔다가, 어제 본 그 얼굴을 또 본다? 그것도 직장 상사 얼굴을? 차라리 출근을 하라고 하지, 그건 수당이라도 나오니까.

하지만 방금 눈앞을 스쳐지나간 사람은 분명 그 사람─퍼시벌 그레이브스였다. 너무 당황해서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급히 방향을 트느라 누구와 같이 있는지까지는 못 봤지만 아무튼 그 사람이었다. C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운 것 같았다. 집에 가야 될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S를 끌어당겼다. 우리 다른 데로 가자. 공원 안 쪽에 다른 벤치 없냐.

"여기서까지 마쿠자 사람을 볼 줄은 몰랐네……. 근데 방금 누구야?"

그렇게 공원 안 쪽까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 와서 한숨을 돌리고 있으면, 다소 뒤늦은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C는 비어있던 벤치를 찾아 앉고는, 등받이 뒤쪽으로 고개를 한껏 젖히며 한숨을 내뱉는 듯이 물었다. 정확한 답을 기대하고 흘린 물음은 아니었다. 정말로.

"뻔한 거 아냐? 사모님이지."

그래서, 이런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

……몰랐구나. S는 어쩐지 연민하는 듯한 시선으로 C를 보았다. 너는 안보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게 언제적인데 아직까지 그것도 몰랐냔 시선이었다. C의 황망한 시선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허공을 떠돌았다.

"사이 좋으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뭘 그렇게 아들 장가보낸 어머니 같은 표정을 지어."
"그래도……, 그렇게 다정한 표정을 짓고 계신데 어떻게 안 그래."
"……다정한 표정."

다정한 표정이셨단 말이지. 그건 내가 엉망진창으로 쓴 보고서를 올렸을 때 피곤하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써오라고 하셨을 때의 그 웃음과 비슷한 걸까. 그는 자신이 온 길을 괜히 돌아보았다.


04.

"아아이스크리임."

사내를 질질 끌다시피하며 여인은 아이스크림 트럭의 차양 아래로 걸음을 들이밀었다. 그리곤 제 머리카락의 색과 똑같은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퍼시도 드실래요? 여인이 물었고, 사내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아이스크림 가격을 계산하며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사는 것도 아니면서 꼭 제가 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의 의사를 물었던 여인은, 그러시다면 뭐 어쩔 수 없지요,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사내의 팔에 고개를 툭 기댔다.

"대신 제 거 한 입 드릴게요."
"나는 괜찮으니까 당신 먹게."
"흐으응."

뭐야, 설레게 하지 마세요. 여인은 시선을 내리깔며 키득거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스크림 콘 위로 프트 아이스크림을 짜올리던 M은 혀 끝까지 올라온 말을 참았다. 딱히 설레게 하지 않으셨는데. 완전 평범한 대화를 하고 계셨는데요, 두 분.

"아, 감사합니다."

서둘러 마무리지은 아이스크림을 여인 쪽으로 내밀면, 조금 전까지 기둥을 타고 자라는 덩굴식물마냥 사내에게 기대어 있던 여인은─여기서 기둥은 물론 그 사내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고 깔끔한 동작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 다시 사내를 이끄는 걸음으로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멀어져 갔다.

좋을 때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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