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앤프로듀서(허묵X채은)
By. 채은
갈 곳을 잃은 동공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어지럽게 흔들렸다. 흔들리는 동공 속에 내포된 심리를 알아챈 건지, 마주앉은 채은이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들며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선배, 괜찮으세요?” 나는 그 말에 정신을 퍼뜩 차리곤 애써 웃으며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몇 모금 들이켰다. 내뱉으려던 본심이 주스와 함께 식도 밑으로 가라앉았다. 괜찮을 리가!
그러니까, 먼저 채은의 연락이 있었다. 과제와 시험공부를 도와줄 수 있겠냐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마침 프로그램 촬영을 마친 직후였던지라 한 숨 돌릴 수 있던 나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금도 갈 수 있는데, 어디로 가면 될까?]
곤색 카디건을 걸치고 서랍에 넣어 둔 차키를 빼내기 직전이었다. 채은에게서 도착한 답장은 예상 외였다. [선배 옆집이니까, 편하실 때 바로 오시면 돼요.] 그때의 나는 별 깊은 생각도 없이 차키를 도로 서랍 안에 넣어두고 대충 슬리퍼를 신고 문 밖을 나섰다. 그때 한 생각을 굳이 떠올리라면, ‘운전 안 해도 되니 편하고 좋네.’ 정도였을 것이다. 바보 같았지. 사실 그때부터 의심을 했었어야 했는데. 왜 채은이가 이 시간에 허 교수님의 집에 있는 건지, 그걸 제일 먼저 의심했었어야 했는데!
“선배,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진짜 괜찮으세요?”
안색을 유심히 살피던 채은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말투에선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속으로 삼켜낸 말이 또다시 튀어나오려는 것을 입을 틀어막으면서까지 억지로 막아냈다. 갈 곳 잃은 눈동자는 테이블 위에 쌓인 전공 서적들을 향했다. 애석하게도 의미를 잃은 후였다. 이곳에 온 본 목적 역시 이미 퇴색된 지 오래였다. 이 상태로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겠어! 뭐라도 해소가 되어야 본전이라도 겨우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채은에게 조용히 손짓했고, 채은은 상체를 쭉 빼서 내게 귀를 가져다 댔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서재 안에 있는 남자가 듣지 못하게끔.
“언제부터였어?”
주어도 목적어도 빠진 물음이었건만 의도만큼은 확실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직설적인 물음에 채은의 낯이 확 붉어졌다. 그제야 나는 굳어버린 입술에 미소를 걸 수 있었다. 부끄러워하는 채은의 모습이 귀여워 더 놀리고 싶어진 것이다. 결국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책들을 모두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이던 채은에게 덧붙였다. “이거 빌려주는 대신, 물어보는 거 다 대답해줘.” 나름 승산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거래였다. 쌓여 있는 책들을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번갈아 바라본 채은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거래 성립이었다.
“…와, 교수님. 이런 이미지일 줄은 몰랐는데.”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평범한 대학생과 인기 교수가 몇 번의 우연을 지나 연인이 되기까지의 시간을 두 시간으로 압축해 놓은 것만도 놀라운 거겠지. 이미 구석으로 밀린 책들은 뒤로하고, 채은은 말을 더 이어갔다. 처음엔 머뭇거리더니, 이제는 제가 말을 더 하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경계심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느슨해지기 마련이었다. 어디에도 새어나가선 안 되는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삭이듯 시작한 말들은 어느덧 소란스러운 수다가 되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덕분에 머지않아 서재 안에 있던 교수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채은이 어색한 듯 웃었다.
“교수님, 나오셨어요? 유연 선배 오셨어요.”
웃음은 어색했을지언정 교수님을 대하는 채은의 태도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신혼부부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흐름이었다. 허 교수님은 내게 인사를 건넨 후 채은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 행동마저도 자연스러웠다. 표정을 관리하는 게 힘들어질 지경이었다. 말로 들었을 때만 해도 충분히 신기했는데, 그 모습을 직접 마주하니 더 신기했기 때문에.
“둘이 연애하는 거 왜 말 안 해주셨어요?”
“채은 씨가 비밀로 하자고 했거든요. 채은 씨와의 약속이라면 뭐든 지켜야죠.”
정말, 이런 이미지일 줄은 몰랐는데. 문득 촬영장에서 그간 봐 왔던 교수님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나이에 수려한 외모,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미지, 하지만 선은 확실히 지키던 모습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허 교수가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경계를 풀고 팔불출이기까지 할 수가 있는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제껏 봤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던 탓일까, 왠지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머릿속에선 이상한 망상 같은 것들이 피어올랐다. ‘뇌 과학의 최고 권위자 연모대학교 허묵 교수, 대학생과 은밀한 비밀연애 중’ 정도의 연예 찌라시와 다를 바 없는 저렴한 헤드라인 따위였다.
“그래도 섭섭해요. 채은이랑 저는 아는 사이인데. 게다가, 옆집 사이면서 인사도 한 번 제대로 안 하고.”
“미안해요, 선배. 그래도 선배한테는 이제 숨기고 싶지 않아서 말해주려고 오늘 집으로 부른 거예요.”
반쯤은 장난으로 내뱉은 말이었건만, 채은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내게 사과했다. 축 늘어진 눈매를 보자니 결국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아래로 향한 채은의 눈은 금방 제자리를 되찾았다. “뭐, 둘도 사정이 있었던 거니까요.” 하는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채은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지는 것을 보자니, 강아지처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녀의 앞에 앉은 교수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차마 제삼자는 보기 힘들 정도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저 시선이 이를 증명했다.
“교수님, 그렇게 좋으세요?”
“네. 사랑이 이렇게 좋은 감정인 줄은 이전까진 미처 몰랐거든요.”
“전에 방송에선 사랑에 대해 그렇게 잘 설명해 놓고선.”
“과학적으로 증명된 건 이론으로 잘 알고 있죠. 하지만 이론과 실전은 조금씩 다른 법이니까.”
그리고 사람은 실전을 겪으며 성장하고요.
교수님은 채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웃었다. 자신을 성장시켜준 유일한 사람. 그에게 있어 채은은 더없는 은인이었으리라. 한편 채은은 빨개진 얼굴을 하고는 제 머리 위에 올라온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선배가 보고 계시잖아요!” 기어들어갈 듯 조그마한 목소리는 이 상황이 쑥스럽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냈다. 허나 교수님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무래도 교수님은 더 이상 내 앞에서 이 관계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채은은 남이 보는 앞에서 받는 애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았는지, 부끄러운 듯 고개를 폭 숙였다.
“유연 씨는 당신이 부른 거잖아요. 저한테 물어보기까지 해놓고선. 그래놓고 왜 당신이 부끄러워해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죠! 그리고 스킨십 보여주겠다고 선배를 부른 게 아니잖아요.”
채은의 항변에 못 이기겠다는 듯, 교수님은 손을 거두더니 그녀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채은의 얼굴이 곧 잘 익은 홍당무처럼 시뻘개졌다. 이내 집안은 채은의 빽, 하는 비명소리로 시끌벅적해졌다. 나와 교수님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퍽 즐거운 시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분명 채은의 메시지를 받고 이곳에 들어온 게 일곱 시 남짓이었는데, 집을 나설 때가 되니 시간은 열 시가 훌쩍 넘어가 있었다. 결국 과제와 시험공부는 채은이 밤새 혼자 짊어지게 되었다. 테이블 위에 쌓인 전공 서적들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채은에게 나는 조금이나 도움이 되어주고자 말을 얹었다.
“김 교수님은 이 포스트잇 붙여놓은 데에서 시험 다 내시니까 이 부분만 집중해서 파면 될 것 같고…, 정 교수님은 매년 다르게 출제하시니까 웬만하면 시험 범위는 다 읽어보는 게 좋아.”
채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빌려준 책들을 한아름 끌어안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당장 내일 있을 시험을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와중에 “선배 조심히 들어가요.” 라는 인사는 잊지 않고 챙겼다. 귀여워라.) 그러한 이유 덕분에, 처음 집에 들어올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채은이었으나 마지막에 나를 배웅하는 것은 자연히 교수님의 몫이 되었다.
“오늘 못 도와준 채은이 과제는 주말에 도와주러 올게요. 그래도 될까요?”
“채은 씨랑 연락해 봐요. 채은 씨가 된다면 저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그의 세상은 채은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마치 지구의 주위를 일정한 궤도로 공전하는 달 같았다. 아름다운 색을 가진 행성에게 이끌린 무채색의 위성은 그 주위를 돌며 제 생(生)을 잠식당한다. 나는 소파에 대강 걸어 둔 카디건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이제는 두 사람의 시간을 지켜줘야 할 때였다.
“그럼 제가 채은이한테 나중에 따로 물어볼게요. 주말에 보게 되면 셋이 같이 밥 먹어요.”
“좋아요. 그땐 제가 식사를 대접할게요.”
두 사람의 집을 나선 후, 나는 복도에 감도는 냉기에 못 이겨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에는 문득 주말에 모이게 될 세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웃으며 카디건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 두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주말에 찾아갈 땐 집들이 선물이라도 사 가야 하나, 하는 등의 소소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루가 다 저물어가기 직전의 시간이었다. 왠지 벽 너머로부터 단란한 그들의 공기가 여기까지 서서히 스며드는 듯했다. 보는 사람까지 미소 짓게 하는 따스함이 몸 주변을 오랫동안 은은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의 밤에 부디 좋은 꿈이 깃들길, 복잡했던 생각을 이내 갈무리하며 따뜻한 잠결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