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속의 유령이 들려주는 이야기
해리포터 시리스(세베루스 스네이프X엘리너 퀼)
By. 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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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네스 헤이스팅스-쿠퍼, 마녀 마그다 헤이스팅스-쿠퍼와 홀스버리 백작 루퍼스 헤이스팅스-쿠퍼의 딸, 마녀이자 서적 수집가, 호그와트 벽 속의 유령, 이게 나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내가 스스로 붙인 마지막 이름을 빼면 앞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핀도르의 닉이야 사람들이 자기를 니콜라스 드 밈시-포핑턴 경으로 기억해 주길 바라는 모양이지만 나는 어차피 살아있을 때도 명예욕이 있다기보다 사람들이 나한테서 관심을 꺼줬으면 싶던 편이었으니 말이다. 생전에 뭘 주워 모으는 걸 좋아한 바람에 수집품을 기증한 도서관에 내 초상화가 걸려 있다는 게 가장 큰 고통이다(다행히 그건 호그와트가 아닌지라 도서관에 방문한 사람들이 내 얼굴을 한 번씩 훑고 지나가는 꼴을 이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내가 왜 벽 속의 유령인가 하면, 그 또한 죽은 후에도 성향이 바뀌지 않은 고로 복도를 지나다 누굴 놀라게 해버리거나 관심을 주고받는 게 귀찮은 탓에 이 학교의 두꺼운 벽 속에 숨어 다니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느라 볼 꼴 못 볼 꼴 다 보긴 하는데 어쩌겠나, 과묵한 유령한테 사생활 좀 들키는 건 산 사람이 참아 주길 바란다. 요즘 사생활을 들키고 있는 사람의 예시로는 비밀 연애를 하는 것 같은 교수 둘이 있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니고(아주 조금 호기심이 있긴 하지만 사리사욕으로 사람을 쫓아다니진 않는다) 원체 그늘지고 싸늘하고 음습해서 내가 막 돌아다녀도 사람들이 유령이 있는 둥 마는 둥 별 생각 없이 지나치는 곳이라 지하 감옥 쪽에 주로 머물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내 기준으로 두 사람은 최근 상당히 꼴값을 떨고 있는데 얼마 안 된 연인이라는 게 다 그러니까 뭐 너그럽게 넘어가자. 그렇지만 복도에 사람도 없는데 꼭 저렇게 손을 잡을락 말락, 잡을락 말락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렇다. 세베루스 스네이프와 엘리너 퀼이 지금도 내가 통과하던 벽 앞에서 시간을 늦추고 싶은 양 느릿느릿 걸으며 두 번이나 손이 닿고는 흠칫하면서 팔을 자기 몸에 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 이틀 사귄 것도 아닌 사람들이 손잡는 걸로 유난이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
“……으흠.”
세 번째로 손등이 닿은 후 두 사람 다 말이 없더니 스네이프 쪽이 헛기침을 했다. 퀼은 굳이 시선을 돌리고서 부산하게 한쪽 팔에 끼고 있던 양피지를 고쳐 안았다. 둘 다 평소에 꽤 창백한 편인 얼굴에 드물게 홍조가 올라오고 있었다.
“저, 이제 길이 갈라지는데요.”
“……데려다주마.”
비록 두 사람의 사무실은 20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으나 퀼은 아까보다 조금 더 수줍어 보였다. 퀼이 얕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스네이프가 시선을 돌리더니 갑자기 둘 다 0.5cm쯤 튀어 오르기에(튀어 올랐다고 말하기 힘든 높이지만 깜짝 놀라는 게 그런 느낌이다) 몸이 벽 밖으로 너무 삐져나오지 않게 조심하면서 고개를 돌려보자 둘이 드디어 손을 잡고 있었다. 살며시, 스네이프의 손이 느슨하게 퀼의 손끝을 쥐고 있다가 곧 손 전체를 꼭 감싸 쥔다. 힘줄이 튀어나온 큰 손, 단단하고 길쭉한 손가락이 하얀 손등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쉽사리 상대의 마른 손을 숨긴다. 퀼이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는 손가락을 움직여 스네이프의 손을 마주 잡는 게 보였다. 그제야 둘의 눈이 탁 마주쳤다. 서로 입술을 들먹이기만 하고 마른 침을 삼키더니 그런 자기들이 우스운 모양인지 스네이프는 표정이 느슨해진 얼굴을 다른 손으로 쓸어내리고 퀼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음, 우습긴 하지…….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내서인가 딴판인 듯하면서도 묘하게 닮은 얼굴들이 비슷한 표정으로 곤란한 한숨을 쉬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그러고는 대충 뿔달팽이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발걸음을 다시 옮기는 둘을 따라 나도 느릿느릿 벽 속을 움직였다. 말했지만 사심이 있어서 따라다니는 게 아니다. 가는 방향이 겹치는 김에 겸사겸사 구경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커플을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십대 학생들의 고만고만한 연애에서도 한 달 만에 볼 장 다 보는 애들이 많던데 다 커놓고 이렇게 진도가 느린 조합도 드물다. 언뜻 건조해 보이지만 잘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고. 지금도 스네이프가 다섯 번쯤 손을 멈칫거린 다음에 비어 있는 손의 검지로 퀼의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고 있었다. 반대쪽 손을 이미 잘도 잡고 있으면서 이쪽 손은 피부에 닿으면 퀼이 깨질까 걱정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닿기 싫은 줄 알겠어.
“그걸 굳이 네가 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건 왜 그러는 거냐?”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요. 어차피 거의 다 왔습니다.”
“흠.”
별로 진지하게 트집을 잡은 게 아니었는지 찡그린 것치고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얼굴로 스네이프가 짧게 혀를 찼다. 퀼이 그를 올려다보면서 가볍게 입술을 휘어 웃었다. 습기 찬 돌벽에 걸린 횃불이 그 뺨에 따뜻한 빛무리를 쏟아 이미 부드럽게 반짝일 법한 표정에 어룽어룽 빛과 그림자를 장식했다. 스네이프보다는 잘 웃는 사람이어도 저렇게 흐뭇하고 행복으로 설렌 얼굴은 이럴 때에만 보이는 것 같다. 잘 되어가는 연인을 보니 생전 기준으로도 꽤 과거의, 연애라고 말하기도 뭣한 나의 참담한 기억이 문득 떠올랐으나 묻어두자. 두 사람이 몇 마디를 나누고 잡은 손을 서로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걷는 모습을 잠시간 더 지켜보자 어느새 퀼의 사무실 문 앞이었다.
“그럼……안녕히 주무세요.”
“좋은 밤 되길.”
작별인사를 해놓고도 퀼은 몸만 문틀 안에 들어가 있지 문을 닫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침내 스네이프가 먼저 자리를 뜨려고 발끝을 돌리는 찰나 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재빨리 발돋움을 해서 멈칫한 스네이프의 입가에 입을 맞춰놓곤 씩 웃는다. 태연하게 문고리를 잡은 손과 달리 시선은 한 박자 이르게 도망가고 뺨은 아까보다 미미하게 더 붉은 것 같았다. 아니, 손도 문고리를 꽉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가 난리가 났군. 순간 긴 손가락이 문고리를 놓치고 투둑 떨어졌다가 오므라들어 꾹 주먹을 쥐었다. 스네이프가 고개를 숙여서 그녀의 턱을 당기고 재차 입 맞추고 있었다. 퀼의 입맞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접촉에서 끝날 것 같더니 기껏 간격을 벌리고 퀼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어째 소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두 몸뚱이가 와락 맞붙자 희미하게 옷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겨우 들이켜는 숨소리와 양피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퀼이 고개를 젖힌 채 어설프게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손 가는 대로 뒷목이며 머리칼을 쓰다듬는 동안 스네이프는 다소 서투르게, 그러나 정중하다고만은 말하기 힘든 태도로 퀼에게 열중하는 것 같았다. 그래, 좋을 때다……. 내가 아무리 유령이라도 슬슬 최소한의 사생활을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 가던 길을 포기하고 꾸물꾸물 벽 속에서 진로를 돌리려는 차에 두 사람이 생각보다 빨리 몸을 떨어트렸다. 아, 다행이군. 하기야 비밀 연애 같던데 열린 문간에서 오래 달라붙어 있으면 안 되겠지. 둘 다 얼굴이 벌겋다. 지금 둘을 보면 아무도 그들이 핏기가 없다는 소리는 못 할 것이다.
“정말로, 안녕히 주무세요.”
“잘……자거라.”
퀼이 한 걸음을 물러서면서 속삭였다. 실질적으로 시간을 따지면 30초도 지나지 않은 사이에 숨이 턱 끝까지 차버린 양 호흡이 가쁘다. 지금까지 기나긴 이별을 해놓고도 아쉬운지 한껏 달뜬 눈으로 스네이프를 바라보면서 한참 시간을 들이고서야 달칵 문이 닫혔다. 몇 초 뒤에야 닫힌 문을 멍하니 쳐다보는 걸 멈춘 스네이프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짧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스네이프가 저렇게 얼이 빠진 건 그가 학생일 때에나 봤던 기분이군. 역시 사랑은, 특히 연애는 사람을 좀 모자라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두 사람이 마침내 사라진 복도로 나와 배수관을 마주치지 않고 바로 위층으로 연이어 올라갈 수 있는 천장에다 몸을 밀어 넣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그 계절이 영원하든 한때이든 연인은 행복하고 꽃은 만개했는데. 사랑에 빠진 바보가 되어서는 곤란한 사람마저 결국 그 향에 만취하는 것을. 어차피 내가 할 수 있고 해도 되는 일은 지켜보는 것 정도다. 그들이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관계를 만든 지금도,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도 말이다. 나는 무심한 벽 속의 유령일 뿐이다. 다만 지금 같은 ‘좋을 때’가 오래도록 이어지길,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들에게 행운을 빌어보고 싶었다.